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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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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교는 고려 성종 6년인 987년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당시 12목의 하나였던 청주에 향교와 문묘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창건년대는 명확하지가 않다.(그 당시 전국 십이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청주향교와 문묘는 『동국여지승람』에 향교:재주동이리 문묘:재향교라 하여 관아 동쪽 2리에 묘학동궁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와 일치하고 있다. 그 후 1444년(세종 26)에 세종이 치병하기 위해 초정에 행행하였을 때 『통감강목』·『통감절요집성』·『통감훈의』·『근사록』·『소학』·『한문』 등 서책을 하사하였고 1464년(세조 10)에는 세조가 속리산 가는 길에 문묘에 대뢰로서 친히 제사를 올림으로써 ‘삼남에서 으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종식된 후 1609년 (광해군 1)에 이르러 본현 남방 기산리로 이건하였다. 1663년(현종 4)에 명륜당중수를 가하였으며 1683년(숙종 9) 현감 이언기가 현위치로 재이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 고종16년에 군수 장한의 주관하에 명륜당에 일대중수를 가하였고, 1905년에 군수 이명재가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1938년에 직원 김명제가 재임중 대성전 중수에 이어 사재를 희사하여 사무실을 짓고 경의재라 제액하고 사무실로 사용하던 중 숭인관 신축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명륜당 번와·도로보수 등 일대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동서양무가 불에 타 1981년에 서무를 1982년 동무를 복원하였다. 조국 광복후 1957년에 처사 채진두의 희사금으로 증반실을 복원하였고 1969~1971년에는 시. 도 보조금과 유림성금으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증반실, 경의재, 홍전문을 중수하고 교직사를 개축하는 등 창건이래 최대중수를 단행하였다.

1973년에는 교궁주변시설과 환경정화공사를 완료하여 면모를 일신하였고, 1979년에 제기, 관복, 제복 등 비품을 구비하였다. 그 후에도 중. 보수공사가 이어져 1980년 담장개축, 대성전계단, 보도개설, 내삼문 번와, 홍전문개건, 축대개축과 2006년도에는 명륜당 내외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4계절 교육시설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1985년 양현당, 1996년 복지회관, 2001년 숭인관 신축등으로 교육 및 복지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 오늘날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향교와 문묘의 배치는 앞에 향교로 외삼문과 명륜당을 두고 그 뒤에 문묘로 신문과 대성전 그리고 묘정 좌우에 동서양무를 둔 전교후묘의 형식이다.

청주향교는 1977년 12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9월 재분류되어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청주향교는 조선시대의 주학이며 교관으로 세종때 유학교수 1명을 두었다가 성종때 종6품의 교수 1인을 두고 『경국대전』에 교생의 수를 90명으로 정하였는데 『호서승람』에 68명 『호서읍지』에는 90명 『충청도읍지』에도 90명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학전은 세종 27년(1445)에 10결이 지급되고 『대전속록』의 규정은 10결, 『속대전』의 규정은 7결인데 실제로 얼마나 보유했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본향교 대성전에는 오성과 송조육현 그리고 우리나라 십팔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