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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eunbi Kim 조회수 1714 등록일 2007-12-03
제목 땡중 씨다발이들의 護國佛敎觀
땡중 씨다발이들의 護國佛敎觀 경칭생략 본인은 한국 승려들이 과거에 한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하거나 다치고 勞力을 제공한 공을 깍아내릴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그런것을 과장해서 무슨 승려들이 몽고하고의 전쟁이나 임진왜란때 儒臣 강감찬이 거란병을 섬멸시킨것이나 그 보다는 훨씬 떨어지지만 임진왜란때의 권률등 의병장 이나 火車를 발명해서 싸움에 이용하게 한 망암 변의중 처름 전세에 큰 중요한 요인 (要因)이 된것처름 말해서 의병 들을 공을 가로채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임진왜란때 많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혔다. 조영규 대사란분은 승군 수백병을 이끌고 700 명 유생들로 된 의병과 같이 싸우다 전부 전사했다. 그 당시 군은 관병, 의병, 승병으로 되여있엇는데 관병은 도망만 첫고 승병은 숫자가 적어 전세에 큰 영향를 못 끼첬지만 그런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했고, 의병이 행주산성, 첫 진주성 싸움에서 주 활약을 했다. 그 당시 승려 수는 만명정도 되었다. 승려는 勇力이 있어 武科에 합격할만 사람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문과에 합격할만한 才士들도 아니다. (서산대사 같은 분도 과거에 3번이나 떨어저서 결국 출가했든 분이다). 그저 그런분들이 티끊세상을 피해 출가하다 보니 용맹이나 지모가 출중한 분도 없지만 충성심 하나 가지고 승병이 된분이 전 승려 만명에서 1/10 인 천명정도 되었다. 그당시 향교 수가 500개 정도인데 일년에 10명이 졸업했다 치면 5000명이 매년 전국서 졸업햇고 이들이 보통 30년 이상를 살기 때문 (그당시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평균수명이 작앗지 일단 20살 까지 살면 50살 까지는 살었다) 전국에 그 당시 최고 학부를 나와 선비라고 불릴수 있는 선비가 5000 X 30=15만명 정도 있었다. 이중에서 10%가 의병으로 활동할수 잇어 전국에 약 만명 내지 남 오천명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선비는 6藝를 훈련해야 하는데 6예중 射(활쏘기), 御(말타기)가 있어 사,어를 익히여야 하는데 향교에서 제정문제 때문 어를 연습하기 힘들고, 사는 무관이 될려는 무사들이 있기 때문 특별이 강조를 안했지만 권률 모양 활쏘기를 익힌분이 더러 있었다. 의병이 행주산성 싸움 첫진주성 싸움에서 主력으로써 활약했다. 특히 望庵 邊以中은 火車 300대를 제조해서 그중 40대를 행주산성에 보내 싸움을 이기게 했다. 승군 천명중에서 수백명이 순국한것은 전 승려 수를 보면 대단한 국가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 려말, 이조 초기에 형성된 불교승려에 대한 나쁜 이메지를 없앨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승군이 戰勢에 큰 중요한 요인 (factor)이 된것은 아니다. 불교 믿은 인물들이 지금까지 과학에 기여가 없고 (집현전 유학자가 한글 발명한것 처름), 대개 (극히 소수 가령제외) 만날 군청 급사나 옜날 통인 정도 밖에 자격이 없는 것은 (한국에 불교들어온지 1400동안 純佛子중 정승 판서급 된 사람이 몇명인가 들어보라) 크기의 급수 (order of magnitude) 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을 할려면 정확한 숫자는 모르더라도 크기가 어떤 단위로 1 정도 인지 (가령 1.2, 3.2 , 0.7), 10 정도 인지 100 정도 인지를 알어야만 된다. 僧兵/義兵 의 order 가 1 이상 이라고 알고 있어면 이는 흐릿비리해서 군청 급사나 통인도 못하고 땡중 씨다발이나 해야한다. 승려들을 임진왜란때 목숨을 바처 국가에 충성 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절 인력과 재정으로 만든후 불교 승려에 대한 image 가 좋아져서 절은 수확한 쌀에 대한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고 예비군훈련에 해당하는 병역을 확고하게 면제시켜주었다. 이렇게 혜택을 주니 세간서 농사 일하기도 싫고, 공부는 물론 못하고, 자식이나 많히 났도록 해서 인구 증가를 시켜 (그 당시는 아들 딸 많히 낳아 인구증가시키는것도 한 愛國하는 길이엿다) 애국자노릇도 못하는 흐리비릿한 인물들이 머리깍고 중이되서 절에서 그저 건성으로 지내게 되었는데 이 인물들이 삼복더위때 수행하는 체라도 했어면 삼복더위에 농사짓는 농부들이 불평안하는데 삼복더위때 시원한 절에서 놀고 지내니 농부들이 왜 절 논밭에서 추수한 곡식에 대해 세를 부과안하고 땀흘려 일한 농부들한테만 세를 부과하느냐? 고 불평했다. 爲民정치를 구호라도 하는 이조정부가 그 불평을 무시할수 없지만 절에 세금을 부과할수는 없어 정부는 정부대로 불교에 대해 말로만 聲討했다. 그렇지만 절 재산 논밭에서 수확한 쌀에 대해 세금을 메기고 승려만을 강제노동 시킨적은 없었다. 이 것이 구한말 목탁만 두들길줄 알면 승려로써 먹는데 큰 지장이 없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3대 아승기겁 동안 쌓은 복덕중 2/3 는 부처님으로써 나타나서 쓰고 1/3 은 말법시대 박복한 승려한테 주었기 때문 말법시대 승려가 타고난 복이 빈약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거나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 부처님 眞身 사리 탑은 천하에 좋은 명당터여서 후손 (말법시대 한국 승려해당 )들이 밥먹는데는 아무 지장 없는 터다’ 란 말들을 인용하게 된 원인이다. 이조 500년동안 배불숭유는 국책으로 했다. 그것은 爲民政治를 해야하는 유교국가로써 불가피한 것이였다. 겉으로는 배불을 햇지만 고위 관료급이나 왕이나 왕의 에미, 할매 등이나 지방 大儒들이 불교를 안으로는 지지해주었다. 이조 500년동안 불교를 없애자고 생각한 왕은 단 한명도 없었다. 흐릿비릿하고 지 잘못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인물의 대표자로 임진왜란때의 이순신을 박해한 선조등이 불교신자다 (선조가 독실한 불교신자인지 아닌지는 서울 북쪽 수락산에 있는 절에 써인 글을 보면 안다). 정승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급은 과거 합격한후 출사해서 30년 쯤 되야 올라가는 지위이기 때문 이들은 불교에 대해 친불, 배불을 안하고 중립을 견지했다. 구 한말 영의정 지낸 金聲根같은 분도 개인적으로는 염주들고 염불했지만 여하한 佛事를 장려한 일이 없다. 판서 참판 이하에서는 개인적으로 불사에 시주한 사람은 많어도 불교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이조는 500년 이나 지속했는데 그당시는 서양서는 오스만 터어키외엔 그렇게 오랜기간 유지된 정치형태가 없다. 이 기간동안 전쟁은 임진+ 정묘 왜란 8년, 병자 호란 1년 총 9년 밖에 안되며 그 나마 전국토가 외적에 유린된것은 아니다. 불교를 많히 믿었든 고려 때와 비교해보면 고려때는 70동안 몽골이 13번이나 처들어와서 강화도를 제외한 전국토가 유린되었다. 땡중 시다발이들은 여기서도 승장 출신 김윤후가 몽고의 살레탑을 사살햇고 그 이후 충주성 방어 사령관이 되서 충주를 방어했는 것을 가지고 불교가 무선 戰勢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것처름 했는데 살례탑이 죽은 후도 몽골은 다시 처들어왔고 충주 싸움후에도 몽고는 여전히 한국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때는 몽골들한테 반항을 제대로 못한건 武臣들이 정권을 가진것과 절이 많은 노예와 땅를 가졌기 때문이다. 정중부이후 무신들이 집권을 해서 군발이들이 끼리끼리만 해먹기 때문 초가 삼간이 타도 빈대 죽는 것이 시원하다고, 군발이 위해 목숨을 바처 싸울려고 안했다. 이조 때 태종이 절로 부터 몰수한 노비가 총 8만명 토지는 총 6만결이 됬다고 하는데 (본인은 ‘결’이 현제 써는 단위로 얼마인지 모른다). 8만명이나 되는 남녀가 절에서 중놈들한테 종노릇하고 하고 있었다. 중놈들은 호의호식하고 병역 면제가 되서 노는데 누가 몽골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단 말인가. 고려때의 불교집단은 전반적으로 평균하면 護國에 도움이 되기커녕 廢國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불교을 물리치고 사회정의를 실천하자는 것이 이조 건국의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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