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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배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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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국공 주돈이(道國公 周惇頤, 1017 - 1073)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북송 때의 철학가로 '북송오자(北宋五子)'중의 한 사람이다. 본래의 이름은 돈실(惇實)인데 영종의 구휘(舊諱)를 피하여 돈이로 고쳤다고 한다. 자는 무숙(茂叔)이다. 도주(道州)의 영도(營道)사람으로 송나라 진종 천희 원년(1017)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령 6년(1073)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 계양현령(桂陽縣令)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만년에는 여산의 연화봉(蓮花峰)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염계(濂溪)로 이름하니 후인들이 그를 염계선생으로 칭하고 그의 학파를 염학파라 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역전』 『중용』,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의거하고 도교와 불교의 일부 사상을 받아들였다. 진단의 『무극도(無極圖)』를 개변하여 세계본체와 그 형성 발전을 논한 『태극도설』을 저술하였으며, 공맹(孔孟)의 정통 사상을 위주로 한 철학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고, 『중용』의 '성(誠)' 사상을 계승, 개조하여 '성이란 우주 본체와 인류 만물의 근본 속성이며 법칙'이라고 하였다. 인성론(人性論)으로는 성(性)을 오품(五品), 즉 강(剛), 유(柔), 선(善), 악(惡), 중(中)으로 나누고, 이 중에 중은 "온화하고 절도에 맞으며 천하에 통달할 수 있는 길이고 성인의 일이기 때문에 성인은 가르침을 세워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악(惡)을 바꾸어 저절로 그 중(中)에 이르게 할뿐이다"(『통서』)라고 하였다. 정치사상으로는 예(禮), 악(樂)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은 주장하고, 만물은 각각 그 이치를 얻은 후에야 조화롭기 때문에 예가 먼저고 악이 뒤라고 하였으며, 악을 정치 교화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그의 사상은 송나라 명리학의 개창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송 명리학의 개산조사(開山祖師)로 인정받았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등이 있고, 이 밖에 청인(淸人)들이 편찬한 『주자전서(周子全書)』가 있다.

송나라 영종 가정13년(1220)에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여남백(汝南伯)에 봉해졌고 공자의 묘정(廟廷)에 종사되었으며, 원(元)의 인종 연우 6년(1319)에 도국공(道國公)으로 가봉되었고, 명 세종 가정 9년(1536)에 선유주자(先儒周子)로 개칭되었다.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1032 - 1085)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중의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인데 세칭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하였으며, 하남(河南) 낙양(洛陽)사람으로 송 인종 명도(明道) 원년(1032)에 출생하여 송 신종 원풍 8년(1085)에 졸하였다.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조악(調), 상원(上元)의 주부(主簿)로 발탁되었고, 진성(晉城), 부구(扶溝)의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후에 여공저(呂公著)의 천거에 의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다. 젊었을 때 그의 아우 정이(程頤)와 함께 주돈이(周惇頤)에게 배웠으므로 이정(二程)으로 병칭 되었고, 그들이 장기간 낙양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학을 낙학(洛學)이라고 하였으며, 송유(宋儒)들은 정호를 공맹의 도(道)를 계승하고 크게 발양한 진유(眞儒)로 여겼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마광(司馬光), 소옹(邵雍)과 같은 입장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정을 반대했으며, 인종에게 개혁 방안<치법십사(治法十事>를 올려 토지 겸병의 제지와 병역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농업 생산을 강조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천리를 핵심으로 하는 유심주의의 철학체계를 창립하였는데, 인심(人心)으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해석하여 이(理)와 심(心) 그리고 주관 객관은 융합하여 일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공자의 '인(仁)'의 범위를 확대하여 "인(仁)이란 만물과 혼연하게 한 몸이 되는 것이다"([식인편(識仁篇)]라 하여 인(仁)을 주관과 객관의 상호 융합으로 보았다. 인식 방법으로는 인심(人心)의 자성(自省)과 내구(內求)를 중시하여, "학자는 반드시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해야 한다"(『유서』)고 하였다.

정호의 이론과 그의 아우 정이의 학설은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송원명청의 통치 사상이 되었으니. 이를 정주학파(程朱學派)로 일컬었다. 저서로는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등이 있으며, 후인들이 그와 정이(程)의 저서를 합편한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있고, 『이정집(二程集)』이 있다.

송나라 영종이 가정 13년(1220)에 순공(純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공자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하남백(河南伯)에 봉해졌다. 원나라 문종 지순 원년(1330)에 예국공(豫國公)으로 가봉되었다.

낙국공 정이(洛國公 程頤, 1033 - 1107)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북송 때의 저명한 학자로 '북송오자'중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인데 세칭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한다. 하남(河南)의 낙양 사람으로 송나라 인종 명도(明道) 2 년(1033)에 출생하여 휘종 대관(大觀) 원년(1107)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18세 때는 천자에게 상서하여 세속의 의견을 물리치고 왕도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設書)등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 간당(姦黨)으로 몰려 삭적(削籍)되고 부주(州)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도학열전(道學列傳)]에 의하면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그의 학문은 성(誠)을 근본으로 하였고, 『대학』, 『맹자』, 『논어』, 『중용』을 표지로 삼았으면 육경에 통달하였고 행동거지가 과묵하였으며, 일단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 학(學)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마광과 소옹의 입장에서 왕안석의 변법을 반대하고 '입종자법(立宗子法)'을 주장하였다. 철학 사상으로는 대체로 그의 형 정호와 같으나, 천리(天理)의 명백한 논술을 중시하고 이(理)를 핵심으로 하는 이학사상(理學思想)내에서 변증법 사상을 제기하여 사물의 발전, 변화의 원인은 사물 내부의 대립하는 쌍방의 상호 작용이라고 하였다. 인식론 상으로는 내심의 도덕 수양을 중시하여 거짓되지 않은 덕성의 지(知)를 강조하였으며 문견(聞見)의 지(知)를 반대하였다. 여기서 덕성(德性)의 지(知)는 실질적으로 천리인데, 그는 천리를 인식하고 덕성의 지를 얻는 방법은 격물(格物)이며, 격물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성론 상으로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그리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대립을 강조하였고, 현(賢)과 우(愚)는 기(氣)의 청탁이 결정하는 것으로 봤다.

주요 저서로는 『역전(易傳)』, 『안자소호하학(顔子所好何學)』 등이 있으며, 후인들이 그와 정호의 저서를 합편한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이정집』이 있다. 송 영종 가정 13년(1220)에 정공(正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이양백(伊陽伯)에 봉해졌으며, 원 문종 지순 원년(1330)에는 낙국공(洛國公)으로 가봉되었다.

신안백 소옹(新安伯 邵雍, 1011 - 1077)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송나라 명리학(命理學)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요부(堯夫)이고, 자호(自號)는 안락(安樂)이며, 시호(諡號)는 강절(康節)이다. 공성인(共城人)으로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4년(1011)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녕 10년(1077)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고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와 교유를 맺고 친하게 지냈다. 이지재(李之才)로부터 [하도], [낙서(洛書)] 복희(伏羲)씨의 [팔괘 육십사괘도상]을 전해 받고 이를 깊이 연구하고 통달하여 광대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철학적으로 유불도를 융합하여 송 명리학 가운데 상수학파(象數學派)를 창립하였다. 이를 선천학(先天學)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여기서 영원한 정신 본체인 도가 천지 만물을 낳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우주 생산의 구체화 과정은 먼저 정신 본체인 도가 상수(象數)를 생산한 후 다시 상수의 파생으로 말미암아 구체적 사물이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상수학을 기초로 삼아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우주순환론과 '황제왕패'라는 역사연변설을 제기하여, 우주와 역사는 모두 정해진 단계에 따라 순환하고 변화하여 무궁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공자를 매우 숭배하여 공자사상의 영원함과 사업의 불후를 강조하였으니 공자의 학을 발양하고 계승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으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소옹의 상수이론은 송나라 명리학의 형성과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소옹과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를 합하여 '북송오자'라고 한다. 저서에는 『황극경세(皇極經世)』『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어초문답』 등이 있는데 『황극경세중』의 관물내편(觀物內篇)과 관물외편(觀物外篇)은 철학에 관한 중요한 대표작이다.

송나라 철종이 원우 원년(1086)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도종 함순 3년(1267) 공자의 묘정에 종사되었고 신안백(新安伯)에 봉해졌다.

미백 장재(郿伯 張載, 1020 - 1077)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 중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는 자후(子厚)이고 시호는 명공이다. 봉상미현(鳳翔郿縣) 횡거진(橫渠鎭)사람이기 때문에 '횡거선생'으로 일컬어졌으며, 송나라 진종 천희 l4년(1020)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령10년(1077)에 졸하였다.

관중(關中)에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그의 학을 관학(關學)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병법 논하기를 좋아하였으나 후에 범중엄(范仲淹)의 가르침을 받아 『중용』에 치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佛), 노(老)에 눈을 돌려 여러 해 그 설을 궁구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자 다시 전향하여 육경을 탐구하였다고 한다. 진사에 합격하여 기주사법참군과 운암령이 되었고, 숭문원교서와 감찰어사이행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역을 종으로 삼고 『중용』을 체로 하고 공맹(孔孟)을 법으로 삼아 유가(儒家)로써 도통의 정신을 삼아 자기의 사상을 나타냈다. 그는 공자의 '인(仁)'의 학설을 발양시켰고 학문은 수양공부를 통하여 기질을 변화시켜 '천지지성(天地之性)'을 보존하고 선천적인 선성(善性)을 회복하여 성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자연관으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견지하여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형형색색의 만물이 생멸변화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인식론 상으로는 사람의 지각은 객관 대상, 즉 외물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성론 상으로는 '천지지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대립 개념으로 보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하여 순선(純善)한 '천지지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재의 사상은 송 명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원기일원론(元氣一元論)은 중국 철학사상 유물주의의 원기본체론(元氣本體論)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개창하여 후에 왕정상(王廷相), 왕부지(王夫之), 대진(戴震)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고, 그의 인성론은 주희(朱熹)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정몽(正蒙)』, 『서명(書銘)』, 『경학이굴(經學理屈)』 등과 후인들이 편찬한 『장재전서(張載全書)』와 『장재집(張載集)』이 있다. 송나라 영종 가정 13년(1220)에 명공(明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는 공자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미백(郿伯)에 봉해졌다.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1130 - 1200)

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남송의 유학자로 복건성의 우계(尤溪) 출생이다.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瘦), 둔옹(遯翁) 등이며, 이름은 희(熹)다.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原: 안휘성)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 진회(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사직하고 우계에 우거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에 따라 호적계, 유백수, 유병산 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공부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성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 사상사에 사변철학과 실천 윤리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주희의 철학은 이기철학(理氣哲學)이라 하는데 형이하학적인 기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이(理)를 세워 이와 기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생성론(生成論), 존재론(存在論)에서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에 걸쳐 이기에 의하여 일관된 이론 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전기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근사록(近思錄)』 등이 있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를 완성한 것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전례의(釋奠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등을 저술하였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소봉서(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기근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 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태사(太師), 휘국공(徽國公)으로 추증되었다. 사후에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주자어류(朱子語類)』가 편찬되었다.

송나라 영종 가정 원년(1208)에 문공(文公)이라 시호하였다. 이종 보경(寶慶) 2년(1226)에 태사를 추증하였고 신국공(信國公)으로 봉해졌다가 다시 소정(紹定) 3년(1230)에 휘국공으로 봉해졌다. 순우 원년(1241)에 문묘에 종사되었다.